1. 개요

그리스어: κατὰ Ἰωάννην εὐαγγέλιον, τὸ εὐαγγέλιον κατὰ Ἰωάννην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Ioannem
영어: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공동번역성서)

사도 중 1명으로,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요한(Ἰωάννης, 이오안네스)이 집필한 복음서.[1] 정경으로 인정받는 4복음서 가운데 4번째이며, 공관복음은 아니다. 개신교에서는 요한복음, 천주교에서는 요한 복음서라고 부른다. 상징물은 독수리.

2. 구성 및 형성 과정

요한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 다른 신학적 특징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에게 즐겨 인용되었고, 그 외에도 이교 집단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 복음서를 정경에 넣기 위하여 사도적 전승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해야 했고, 이레네오는 사도 요한이 말년에 에페소에 거주하면서 작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세기 초까지도 요한이 살아 있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 소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사제인 요한과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 요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요한 복음서를 집필했거나 혹은 적어도 요한 공동체(요한 학파)에 예수의 전승을 전한 인물로 보이는 자가 요한 복음서 안에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과연 12사도 중의 1명인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일반적인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둘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묘사된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은 상당히 과격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며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사도 요한을 가리켜 예수가 보아네르게스, 즉 번개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만큼 상당히 급하고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한다. 심지어 이들은 어떤 마을에서 예수를 쫓아내자, 불을 하늘에서 내리게 해서 마을을 태워버리자는 소리까지 했다.

반면에 요한 복음서에 묘사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상당히 지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추정되기 때문에 복음서에 묘사된 사도 요한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2] 게다가 아람어를 쓰는 나사렛 지역의 촌부였으며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던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처럼 고급스러운 그리스어로 씌어진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3]

성서비평학자들에 따르면 문학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과 일관된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에, 한 개인이 썼을 수는 있지만, 사도 요한 계통의 전승을 형성시켜 온 공동체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된 복음서로 추정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고, 유대인의 관습이나 용어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것으로 볼때, 요한 복음서는 티투스가 예루살렘 대신전을 파괴한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회당에서 쫒겨나는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교 경전이 확립된 이후인 90~95년경에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집필 의도

요한 복음서의 일차적인 집필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화육신이었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도는 책 마지막 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복음서 20장 31절

이는 요한의 관심이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데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회당에서 내어쫓기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요한 공동체 성원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해 쓰여진 복음서다.

또한 요한은 그리스 철학이나 신비주의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수단으로 그리스 철학 용어를 사용하였다. 실제로 한국어 번역에 따라서 와닿기는 어렵지만,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그리스어로 된 시다.

4. 특징

4.1. 신학서적 특징

공관 복음서들이 예수의 행적을 역사적인 순서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 복음서는 신학 체계에 따라 쓰여진 복음서로서, 이는 신학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성(神性)을 중시하고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가현설 및 단성론적 학파에 대항하기 위해, 예수의 몸을 찔렀더니 피와 물이 나왔다는 내용을 서술하여,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4.1.1. 3장 16절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공동번역성서)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 중의 일부인 요한 복음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를 표현하고 있는 내용으로 여겨지고 있다.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4] 개신교인 중 어려서 주일학교에 다닌 사람들 대부분은 이 특유의 가락을 붙여서 암송한 기억이 있다.

이 부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다.
  • 외아들을 보내주시어[5] –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 속죄 제물로 드리고 싶었다.
  •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 구원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며, 그 믿음은 예수를 바탕으로 함을 의미한다. 또한 구원은 믿는 사람이 누구든지 열려 있는,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 멸망하지 않고 –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닥칠 멸망을 피한다. 즉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되지 않는다.
  •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 그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특히 개신교에서 중요시하는 소극적 구원론인 이신칭의론의 근거 구절이다. 물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도 주구장창, 더 노골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가톨릭과 감리회의 공동 선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구원이 믿음을 근거로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단지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동을 강조하는 것일 뿐. 성경부터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나와 있으며, 야고보서에도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2장 24절),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2장 26절)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그 증거를 보인다. 행함 그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한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

일부 학계에서는 구약에서 그려지던 ‘힘’과 ‘권능’의 전투신이었던 하느님이, 신약에서는 “사랑의 신”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스티브 오스틴의 “오스틴 3장 16절 가라사대, 난 단지 네 엉덩이를 걷어찼을 뿐이다!”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이쪽은 아직도 전투신이다

4.1.2. 우주적 예수

요한 복음서가 묘사하는 예수는 다른 세 복음서의 예수보다 더욱 스케일이 크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데에서,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부터 시작하지만, 요한 복음서는 아예 예수의 탄생 자체를 그리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는 이미 태초부터 존재했던 분이다. 그는 말씀, 즉 로고스로 불리는데 이 로고스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우주를 창조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성부와 같이 실체로는 하느님라는 것이다.[8] 때문에 다음 구절들에서 보듯이, 요한 복음 안에서는 예수가 “나다(I AM)”(원어: ἐγώ εἰμι)라고 말하는 장면이 강조된다.[9]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Ὑμεῖς ἐκ τῶν κάτω ἐστέ, ἐγὼ ἐκ τῶν ἄνω εἰμί: ὑμεῖς ἐκ τούτου τοῦ κόσμου ἐστέ, ἐγὼ οὐκ εἰμὶ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εἶπον οὖν ὑμῖν ὅτ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ἐὰν γὰρ μὴ πιστεύση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ἀποθανεῖσθε ἐν ταῖς ἁμαρτίαις ὑμῶν. ἔλεγον οὖν αὐτῷ, Σὺ τίς εἶ; εἶπε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Τὴν ἀρχὴν ὅ τι καὶ λαλῶ ὑμῖν; πολλὰ ἔχω περὶ ὑμῶν λαλεῖν καὶ κρίνειν: ἀλλ’ ὁ πέμψας με ἀληθής ἐστιν, κἀγὼ ἃ ἤκουσα παρ’ αὐτοῦ ταῦτα λαλῶ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οὐκ ἔγνωσαν ὅτι τὸν πατέρα αὐτοῖς ἔλεγεν. εἶπεν οὖν [αὐτοῖς] ὁ Ἰησοῦς, Οταν ὑψώσητε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τότε γνώσεσθε ὅτι ἐγώ εἰμι, καὶ ἀπ’ ἐμαυτοῦ ποιῶ οὐδέν, ἀλλὰ καθὼς ἐδίδαξέν με ὁ πατὴρ ταῦτα λαλῶ. καὶ ὁ πέμψας με μετ’ ἐμοῦ ἐστιν: οὐκ ἀφῆκέν με μόνον, ὅτι ἐγὼ τὰ ἀρεστὰ αὐτῷ ποιῶ πάντοτε. Ταῦτα αὐτοῦ λαλοῦντος πολλοὶ ἐπίστευσαν εἰς αὐτόν.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 복음 8장 23-30절)

εἶπεν αὐτοῖς Ἰησοῦ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πρὶν Ἀβραὰμ γενέσθαι ἐγὼ εἰμί.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요한 복음서 8장 58절)

Ἰησοῦς οὖν εἰδὼς πάντα τὰ ἐρχόμενα ἐπ’ αὐτὸν ἐξῆλθεν καὶ λέγει αὐτοῖς, Τίνα ζητεῖτε; ἀπεκρίθησαν αὐτῷ, Ἰησοῦν τὸν Ναζωραῖον. λέγει αὐτοῖς, Ἐγώ εἰμι. εἱστήκει δὲ καὶ Ἰούδας ὁ παραδιδοὺς αὐτὸν μετ’ αὐτῶν. 6ὡς οὖν εἶπεν αὐτοῖς,

Ἐγώ εἰμι, ἀπῆλθον εἰς τὰ ὀπίσω καὶ ἔπεσαν χαμαί. 7πάλιν οὖν ἐπηρώτησεν αὐτούς, Τίνα ζητεῖτε; οἱ δὲ εἶπαν, Ἰησοῦν τὸν Ναζωραῖον. 8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Εἶπον ὑμῖν ὅτι ἐγώ εἰμι: εἰ οὖν ἐμὲ ζητεῖτε, ἄφετε τούτους ὑπάγειν: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Jesus, knowing everything that was going to happen to him, went out and said to them, “Whom are you looking for?” They answered him, “Jesus the Nazorean.” He said to them, “I AM.” Judas his betrayer was also with them. When he said to them, “I AM,” they turned away and fell to the ground. So he again asked them, “Whom are you looking for?” They said, “Jesus the Nazorean.” Jesus answered, “I told you that I AM. So if you are looking for me, let these men go.”
(요한 복음서 18장 4-8절)

로고스는 기원전 500년경 에페소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가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이성적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기원 1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궁극적 원리 – 즉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이성 – 으로서의 로고스를 부정하고 인격적으로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느님이 그의 뜻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곧 필로는 헤라클리투스의 ‘이성적 원리’라는 뜻과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의미를 합한 것으로서 ‘로고스’라는 말을 응용하였다. 요한은 이같은 로고스 개념을 차용함으로서 예수의 신성에 관한 신앙을 그리스-로마 세계에 뚜렷하게 밝힐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복음서 1장 14절)”는 곧 예수가 로고스의 생육신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우주적인 예수관은 요한 공동체가 가진 독특한 측면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전까지는 유대적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고 예수의 탄생을 유태적 관점에서 규정하는게 일반적이었다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적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렇게 로고스라는 그리스 철학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 철학에 익숙한 예상 독자들에게 요한의 사상을 설득시키려는 의도였다.

4.2.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

대체적으로 공관 복음의 경우, 예수의 행적과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초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비신자들이 해당 복음을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의 경우, 초반부터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미 믿음을 가진 교우들이 신앙의 지침으로 삼을 수 있도록 복음서가 집필되었다.

요한 복음서에는 공관 복음서에 있는 많은 사건들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 세례, 시험, 변화산 사건, 최후의 만찬 등이다. 그 이유는, 이미 그러한 사건들이 요한 복음서가 집필될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라는 공관 복음서의 전승과는 다른 전승을 가지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요한은 사건이나 사실보다는 신학 사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자기 계시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는 예수의 전기 대신 강생에 대한 요한의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견해가 실려 있다. 따라서 요한의 “예수의 인물과 가르침에 대한 표현”은 공관복음의 표현과 아주 다르다. 요한은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본성 및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병을 고치는 기적을 소개할 때에도,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신성의 ‘표적’으로서의 기적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짧게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강의에 가까운 긴 어록이 많이 실려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사실 대부분의 요한 복음서의 내용은 이러한 예수의 강의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공관 복음서에 생략된 부분이 요한 복음서에는 길게 실려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카나의 혼인잔치

유명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 니코데모(3장 1 ~ 21절, 7장 50 ~ 52절, 19장 39절)

바리사이이자 최고 대의회 의원이었다. 당대 유대인 사회의 인텔리. 예수를 시험하고자 몸소 예수를 찾아가서 질문을 던지는데, 이 때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대화 이후 니코데모는 예수를 변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제들은 그를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토라를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하고 디스한다. 예수가 죽고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온 것도 그다. 가톨릭의 전승에서 그는 개종하고 순교했으며, 순교자 성 니코데모(축일 8월 3일)로 공경받아 왔다.

  • 사마리아의 여인과의 대화

가톨릭에서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 훗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카르타고에서 순교한 성녀 포시나(Photina, 축일 3월 20일)라고 가르치고 있다.

  • 라자로의 부활 사건

성 라자로는 이 사건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며, 가톨릭 전승에서는 여동생 마르타 및 마리아[11]와 함께 프랑스 마르세유 지역으로 가서 주교로 순교했다고 한다. 축일은 12월 17일.

공관복음에서 한 번 이상 언급되었지만 요한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처녀탄생설화
  • 예수의 세례[12]
  • 광야에서 고난 중 악마의 유혹을 받음
  • 성체성사의 제정
  • 예수의 승천

이렇게 설명을 하다 보면 여타 공관복음서들보다 훨씬 읽기 어려운 복음서로 느끼기 쉬우나, 막상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읽기 좋은 편이다. 요한 복음서는 문장력 자체가 상당히 뛰어난 편인데다가, 예수께서 얼마나 짱짱맨인지를 여러 에피소드에 걸쳐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신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시도를 완전히 배제한 채 미리 신성을 전제해 두고 선별한 소수의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께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지를 압축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성경을 처음 읽어보는 사람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4.2.1. 역사적 예수 논쟁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와의 차이 때문에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많은 문제가 대두되어왔다. 이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면, 초기 교부인 오리게네스마저도 요한 복음사가는 사건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는 다른 복음사가보다 서툴렀을 것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이다.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어, 한때는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요한 복음서가 사실 기록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취급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 곧 ‘역사 아니면 신학’이라는 근대적 양자택일은 비판을 받게 되며, 이 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해답이 과거 생각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선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많은 사실을 요한 복음서 저자도 전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활동, 예수가 받은 세례, 여러 기적, 특히 빵의 기적이 이러한 부분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이야기도 전체적으로는 마찬가지다. 해당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요한 복음서 저자 역시 교회 전통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전하고자 하였으며, 또 그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러 사항과 관련해서, 역사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독창적 요소들이 요한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곧 지리와 연대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유대 지방이나 로마 제국의 제도와 관계되는 사항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AD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는 생활상을 잘 알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은 AD 66-72년에 벌어진 유대 독립 전쟁 이후에는 없어져, 저자와는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 것들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을 사실의 목격자 곧 증인으로 여기며,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증인으로 인정을 받는다.(19,35; 21,24)[13] 아무튼 이러한 면모 때문에, 요한 복음서의 예수 증언이 가지는 역사성에 대하여, 역사 혹은 신학이라는 양자택일적 태도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사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역사적 예수 연구가 현대에는 다 식어버린 떡밥이 되어버린 감도 있고(…)

4.3. 간음한 여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로 대표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잘 알고 있는 매우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에피소드는 요한복음 원저자가 쓴 것이 아니라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는 논란이 있다. 현재는 각종 문헌비평 수법을 적용하여 이 에피소드가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굳어지고 있다. 자세한 것은 간음한 여인과 예수 항목 참조.

4.4. 요한 복음서 21장

요한 복음서 21장은 후대에 덧붙인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요한 복음서의 사본 중 21장이 생략된 사본이 발견된 적이 없고, 20장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포함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신학계에서도 더 이상의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요한 복음서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14] 이 문제 때문에, 요한 복음서는 2명 이상의 집필자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21장에 대한 다른 이론으로는, 요한 공동체와 베드로에게서 정통성을 이어받은 걸로 보이는 주류 사도전승 교회가 화해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다. 21장에서는 예수는 그를 3번 부인한 전례가 있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3번 묻는다. 그리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3번 말한다. 특히 ‘양들을 잘 돌보라’는 대목은 사실상 베드로의 수위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이론에 따르면, 요한 공동체가 분열되어 한쪽은 영지주의와 결합하고 다른 쪽은 주류 사도전승 교회에 편입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요한 복음서가 정경이 될수 있었던 것도 주류 사도전승 교회와의 연합의 결과라는 추측도 있다.

21장의 마지막 구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천주교 새번역)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성전(거룩한 전승)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천주교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성경에 없는 전승도 교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로 내세운다.

4.4.1. 아가페와 필리아?

이 대목의 그리스어 원문에서 예수는 “αγαπας με(agapos me)”라고 묻지만, 베드로의 대답은 “φιλω σε(philo se)”이다. 베드로는 대답에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말을 붙이는데, 이는 헬라어로 ‘경험해서 알다’인 ‘기노스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를 두고 예수는 베드로에게 자신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물어봤지만, 베드로는 의역하자면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저는 필로스의 사랑밖에는 하지못합니다.”라고 겸손을 나타냈다는 시각이 있다. 3번째 예수의 질문은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인데, 이것을 두고 예수가 대인배답게 베드로의 인간적 사고방식에 맞추어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그래, 그럼 필리아 사랑은 할 수 있냐?’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αγαπώ’와 ‘φιλέω’가 다른 뜻으로 쓰였다고 볼 근거가 충분치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요한복음 21장의 이 두 단어의 뜻을 구분했지만, 요한 크리소스토모[15] 등 당대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교부들이나 에라스무스 등의 학자들은 이 두 단어의 뜻을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다 19세기 영국의 트렌치가 <신약성경의 동의어들>이라는 책에서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했는데 이는 성경 이전 시대의 고전 그리스어 문헌들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 요한 복음서에서 두 동사의 용례를 보면 위에서 ‘필로스의 사랑’이라고 해석했던 동사 ‘φιλέω’가 ‘αγαπώ’와 특별히 구분 없이 쓰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20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라는 야훼의 예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구절에서도 ‘φιλέω’가 쓰이며,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사랑’도 13:23과 19;26, 21:20에서는 ‘αγαπώ’ 동사를 썼지만 20:2에서는 ‘φιλέω’ 동사를 썼다.#

4.5. 반유대주의(?)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는 차이는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대적인 기반하에서 예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시각차가 없는 건 아니라서, 마태오 복음서는 친유대교적, 마르코 복음서는 중립적, 루카 복음서는 비유대교적 성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과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16] 예수를 믿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결국 이런 예수와 유대인들의 긴장은 십자가 사건에서 폭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요한 복음서의 예수와 유대인들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은 요한 복음서의 저자, 혹은 요한 복음서를 형성한 예수의 전승을 간직한 요한 공동체와 유대교 간의 긴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동방지역에서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가 긴장되었고, 로마제국의 법에 따르면 불법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를 유대교 회당에서 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요한 공동체는 유대인과 유대교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리란 것이다.